
신용회복위원회와 개인회생 사이에서 고민하던 시간
빚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기 시작했을 때, 처음부터 법원에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일단 법원이라는 단어가 주는 압박감이 컸고, 내가 파산이나 회생 신청을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스스로 인정하기 싫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신용회복위원회에서 하는 프리워크아웃이나 개인워크아웃 같은 프로그램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쪽이 서류도 덜 복잡해 보였고, 대출 이자를 줄여주거나 상환 기간을 늘려주는 방식이라 나중에 신용도를 회복하는 데도 훨씬 유리할 거라 막연히 믿었다. 콜센터에 전화해서 상담 예약을 잡고 대기하는 동안만 해도 금방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내 채무 상태를 뜯어보니 연체 기간이 애매하게 꼬여 있었고, 최근에 받은 카드론이나 몇몇 사채 성격의 채무들은 신회위 협약 외 채권이라 묶을 수가 없다고 하더라. 결국 채권자들의 동의를 일일이 구해야 하는 문제 때문에 신용회복위원회 제도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들 왜 마지막 순간에 머리를 싸매고 개인회생으로 넘어가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방향을 틀었지만, 시작하기도 전에 서류 더미에 깔릴 것 같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서초동 사무실을 돌며 느꼈던 묘한 이질감과 수임료 계약
법률 대리인을 찾아야 해서 서울 서초구 법원로 근처, 정확히는 교대역 11번 출구 뒤편 골목으로 향했다. 건물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수많은 변호사, 법무사 간판들을 보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인터넷 카페에서 대충 후기가 나쁘지 않아 보이는 곳 세 군데를 골라 무작정 찾아갔다. 들어가는 곳마다 공기는 묘하게 차가웠고 나를 대하는 직원들의 태도도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곳은 내 사정은 듣는 둥 마는 둥 기계적으로 질문지 몇 개만 적게 한 뒤 당장 오늘 계약서를 쓰자고 재촉했고, 또 다른 곳은 수임료 분납이 가능하다며 아주 친절하게 응대했지만 왠지 모르게 과장된 영업 느낌이 나서 미덥지 못했다. 결국 적당히 설명이 현실적이었던 한 곳과 변호사 수임료 180만 원에 계약을 맺었다. 한 번에 내기에는 너무 큰돈이라 3개월 할부로 나누어 내기로 했는데, 법원에 별도로 내야 하는 인지대와 송달료 약 38만 원은 일시불로 지금 당장 입금해야 진행이 된다고 했다. 빚을 탕감받고 돈을 아끼려고 시작한 일인데, 시작하자마자 200만 원에 가까운 지출이 생기는 상황이 참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소 직원은 이 정도 금액이면 요즘 평균 시세보다 싸게 하신 거라며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서류 리스트를 툭 건넸다.
서류 준비 단계부터 꼬이기 시작한 통장 내역 조회
사무소에서 받아 든 필수 서류 목록은 예상보다 훨씬 길고 꼼꼼했다. 주민등록등본이나 초본은 기본이고, 지난 5년 동안의 지방세 세목별 과세증명서에 최근 1년 동안 거래한 모든 은행 통장의 입출금 내역을 한 주도 빼놓지 않고 뽑아오라고 했다. 주말에 집에서 노트북으로 공인인증서를 켜고 정부24랑 은행 사이트들을 여기저기 들어가며 출력을 시도했지만, 내 컴퓨터가 구형이라 그런지 보안 프로그램이 깔리다가 멈추는 에러가 반복되었다. 결국 몇 시간 동안 씨름하다가 포기하고 월요일에 반차를 내서 동네 동사무소와 은행 창구를 직접 찾아다녔다. 내가 주로 쓰는 신한은행 창구에 가서 1년 치 거래 내역을 종이로 출력해 달라고 하니 장수가 너무 많아서 수수료만 몇천 원이 나왔다. 은행 직원이 서류 발급 목적을 넌지시 묻는데,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그냥 개인 확인용이라고 얼버무리고 서둘러 나왔다. 받아 든 뭉툭한 종이 뭉치를 훑어보니 편의점에서 소액 결제한 것부터 친구에게 몇만 원 보낸 이체 기록까지 내 지질한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남에게 보여주기가 몹시 꺼림칙했다.
서울회생법원에서 날아온 첫 번째 보정권고의 압박
법률사무소에 서류를 다 넘겨주고 법원에 접수했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을 때는 이제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피를 말리는 과정은 접수 이후에 시작되었다. 접수한 지 3주쯤 지났을 때 담당 직원에게서 다급하게 전화가 왔다. 서울회생법원에서 첫 번째 보정권고가 내려왔다는 연락이었다. 보정서 제출 기한은 14일 이내로 정해져 있었는데, 내용을 보니 숨이 턱 막혔다. 최근 1년 동안 신용카드로 결제한 내역 중 건당 10만 원이 넘는 지출들에 대해 구체적인 사용 목적을 소명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쿠팡이나 배달의민족 같은 온라인 쇼핑몰에서 긁은 내역들은 도대체 무엇을 산 것인지 소명 자료를 만들어서 내라고 했다. 몇 달 전에 내가 뭘 샀는지 기억이 날 리가 없어서 각 쇼핑몰 앱에 들어가 과거 주문 내역을 일일이 캡처하고, A4 용지에 붙여가며 구구절절 설명서를 작성했다. 법원 판사에게 내 생활비를 검사받는 듯한 기분이 들어 자괴감이 밀려왔고, 서류 기한을 못 맞추면 기각될 수 있다는 압박감에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쳤다.
매달 나가는 변제금을 보며 여전히 드는 복잡한 생각들
몇 차례의 보정 과정을 더 거치고 나서야 겨우 개시결정이 내려졌고, 지금은 매달 법원에서 지정해 준 계좌로 변제금을 송금하고 있다. 매월 월급날이 되면 내 통장에서 최저생계비를 제외한 금액이 고스란히 법원으로 빠져나가는데, 남은 돈으로 한 달 생활을 꾸려나가는 게 여간 팍팍한 게 아니다. 예전에는 주말에 친구들 만나서 밥 한 끼 사고 커피 마시는 돈을 아무렇지 않게 썼는데, 이제는 마트에서 라면 하나 살 때도 가격표를 비교하게 된다. 간혹 신용회복위원회를 통해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갚아나가는 방식을 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차라리 상환 기간이 길더라도 매달 나가는 금액이 적은 게 마음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가 들기도 한다. 회생 기간인 3년 동안 내 삶의 모든 여유를 저당 잡힌 기분이라 매 순간이 답답하다. 이제 겨우 10개월 차를 지나고 있는데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직장을 잃거나 예상치 못한 병원비가 크게 들어가는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은 여전히 매일 밤 나를 괴롭힌다. 끝이 나면 다 괜찮아진다고들 하지만, 그 끝에 도달했을 때 내 손에 무엇이 남아있을지는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는다.
온라인 쇼핑몰 결제 내역 소명 때문에 캡처한 사진들 보니까 정말 정신없는 생활이었던 것 같아요. 특히 쿠팡이나 배달의민족 주문 내역을 다시 보니 어떤 물건을 샀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나겠네요.
정말 정신없어 보이셨겠네요. 꼼꼼하게 준비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됩니다.